지령(紙齡) 900호 기념 특별대담/ 이종구 前수협중앙회장

“어업인 뺀 재단 이름 수협 직원 위한 재단인가…이름 다시 환원해야 마땅”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이라고 해야 예산도 더 딸 수 있고 재단 확장성도 더 있어  

병리 현상 심해 협동조합도 혁신해야… “조합도 선거판 전락”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때문에 어민 시회 분열…“제일 안 좋은 현상 생겨”
바다 지켜야 하는 데 왜 항포구 매립…어민 몇 명 없고 낚시 하는 사람만

이종구 前수협중앙회장
이종구 前수협중앙회장

 수산신문 지령(紙齡) 900호 특집을 해 볼까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이종구 前수협중앙회장이다. 수산신문은 2007년 이종구 회장 취임 후 그의 재임 8년 중 6년을 좋게 말하면 수협에 대한 감시자로, 나쁘게 말해 수협 사냥꾼처럼 혹독하게 그가 추진하는 사업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검증했다. 말이 검증이지 이종구 회장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수반됐다. 

 수산신문과 이종구 회장과의 갈등은 이종구 회장 취임 후 불과 몇달이 지나지 않아서 시작됐다. 수협중앙회 부장 모임이 주최한 가야산 등반 모임 때 장병구 신용대표의 조합장 비하 발언이 도화선이 됐다. 이 회장은 장병구 대표가 이 자리에서 조합장을 민주노총에 비유한데다 그 이후 취하는 행동이 마뜩잖아 총회에서 그의 해임을 밀어붙이려고 했었다. 

그때 수산전문지 중 유일하게 그의 행동에 반기를 든 게 수산신문이었다. 그의 발언이 폭탄주를 돌려 마시는 사적인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합장을 비하하는 발언이 아니었다는 장 대표의 발언은 전혀 들리지 않은 이런 집단적 상황은 맞지 않다는 까닭에서다.

이로 인해 불똥이 엉뚱하게 수산신문에 옮겨붙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 회장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해양수산부가 개입해 상황은 갈수록 꼬여갔다. 또 직원들은 중앙회와 신용(은행) 쪽으로 나뉘었고 수협은 ‘한 지붕 두 가족’이란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됐다. 장병구 대표를 쳐 냄으로써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하려는 이 회장 구상은 비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앙회는 수산신문의 가장 큰 수입원인 수협의 광고와 구독을 중단했다. 수산신문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조합장협의회 의결 사항이라며 그 지역 20여 개 조합이 중앙회와 싸우고 있는 수산신문을 구독할 수 없다며 하루아침에 신문 구독을 중단하겠다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우리는 중앙회의 농간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언론중재위 제소는 말할 것도 없고 검찰에 명예훼손 고발,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등 수협중앙회의 수산신문에 대한 고발과 소송이 잇달았다. 이 사건은 수산신문의 존폐와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수산신문은 패하면 신문사 문을 닫아야 하는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 포성이 멎은 건 그가 퇴임을 1년 앞둔 2014년 가을이다. 2010년 잠시 휴전이 있었지만 국감 기사를 빼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10달 만에 다시 신문 구독과 광고를 중단한 지 4년만이다. 이 회장이 수산신문과의 관계를 풀고 가겠다는 심사가 작용한 것으로 우리는 받아들였다.

 2019년 6월, 수산신문은 창간 기념호에 이종구 회장을 특별 초대 손님으로 모셨다. 시간이 흘렀고 이 사건을 정리할 시간이 됐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우리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고 우리는 그를 만나러 그가 살고 있는 진해로 갔다. 그간 쌓였던 앙금을 털어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지난 달 24일 오후 4시, 창원 중앙역에서 다시 이종구 회장을 만났다. 4년 만이다. 우산을 들고 걸어오는 이 회장 모습은 옛날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꼿꼿한 허리에 근엄해 보이는 그의 아우라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손수 몰고 온 차가 창원중앙역을 빠져나가자 이 회장은 “문 대표(그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를 옆에 태우고 이렇게 가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마음은 과거 어느 시점에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회장 차가 10여분 후 창원에서 맛집으로 통하는 조달청 앞 석쇠불고기 집에서 멈췄고 식당 주인이 내 준 식당 방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얼굴이 편해 보이십니다. 지난번 만났을 때는 전답들을 방치해 놓고 관리를 안 해 그것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다고 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지금은 그 밭에서 수확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고 있어요. 일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책도 읽고…그냥 그렇게 보내고 있어요“ 

 그러면서 수협 돌아가는 것이 내심 궁금한지 ”수협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느냐. 수협회장은 잘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취재를 할 수 없는 터라 그의 질문이 반가웠다. 그의 질문이 얘기를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때문에 노동진 회장이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있을까요. 현재 거기에 올인하는 것 같아요. 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는 수산계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해양수산부와 수협이 제 목소리를 내고 제 역할을 해야 해요. 이런 기회를 통해 어업인들이 손해 보지 않고 잘살 수 있는, 담보를 확실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때는 어민들 목소리를 한데 모아야 하는 데 어민들 목소리가 반대, 찬성으로 갈라져 있다”며 “어민 사회 분열이라는 가장 안 좋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지금 회장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나요.

 “글쎄 나 같으면…방류를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다면 어민들 피해에 대한 확실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 같아요. 정부에 대해 대놓고 어민들 피해 보상도 하라고 하고요. 또 이번 기회에 육지에서 바다로 유입되는 쓰레기 등 해양오염 문제, 농약의 바다 유입, 또 중국의 오염수 유입 등도 이슈로 만들어 정부에 대책을 촉구할 것 같아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는 워낙 민감한 이슈라 오래 얘기할 건 아니기 때문에 화제를 수협으로 돌렸다. 

 -퇴임 후 밖에서 본 수협은 어때요. 수협이 잘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러자 그는 대뜸 공적자금 얘기를 끄집어냈다. 

 “내가 공적자금 때문에 엄청난 수모를 겪었던 사람이에요. 공적자금 때문에 온갖 간섭을 받고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공적자금 상환 기반을 다 만들어 놨는데 왜 공적자금을 서둘러 갚습니까. 이자도 안 내는 돈을…. 자기가 회장일 때 공적자금을 갚았다는 공적만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 마음이 상하는 듯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회장 재임 때 많은 일을 하시지 않았나요. 기억에 남는 일이 많으실 것 같은데?

 “완도수협 등 일선 수협 구조조정이 생각납니다. 상호금융이 적자인데다 순자본 비율이 마이너스였어요. 새마을 금고가 도산하는 상황이라서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불안했어요. 또 2012년 12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어업인 한마음대회’를 열 때 대선후보인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 등이 모두 왔었어요. 이 자리에서 후보들에게 해양수산부 부활을 요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해양수산부는 ‘어촌뉴딜300사업’ 한다고 멀쩡한 항포구를 매립하고 있어요. 어업인 소득 창출을 위해서라지만 바다를 지켜야 할 해양수산부가 바다를 매립해 바다를 없애는 게 맞는 얘기인가요”

 그는 “이곳에 어민은 몇 명 없고 낚시하는 사람들하고 낚시 배만 왔다 갔다한다”면서 “어민 소득 올린다면서 얼마 후에는 관리권이 어민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했다. 

 “여가도 활용하는 게 필요하지만 수산자원관리도 중요합니다. 조업하러 가는 사람보다 낚시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자원관리 노력보다 면세유 줘 가면서 낚시배 운영하게 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할 일인가요. 미국처럼 낚시 면허제 도입도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일본 전어련은 바닷가에 식목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는 뼛속까지 어민이다. 그는 1973년 고향인 진해 제덕마을에서 어촌계 간사가 된다. 당사 나이 21살. 그리고 2년 후 이 마을 최연소 어촌계장이 돼 어촌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36세 되던 1987년 진해수협이 부실 수협이 되자 진해수협 조합장에 도전한다. 어려운 조합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조합장이 된 뒤 조합 경영개선을 위해 위판을 하지 않던 피조개를 위판시켰다. 또 하나뿐인 상호금융 점포를 5개로 늘렸다. 이것은 목표와 철학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재임 3년 간 조합장 실비를 한 푼도 안 쓰고 모아 진해수협 장학회(진수장학회)를 만들었다. 어업인을 위해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그는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속에는 항상 어업인이 중심에 있다. 그가 다른 역대 수협회장과 다른 평가를 받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그가 가장 강조하는 ‘어업인 중심 수협’이 잘 드러난 건 그가 만든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이다. 그는 2007년 회장 취임 첫해부터 여기에 매달렸다. 그는 “농협은 재단을 만들어 자녀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그러는 데 계층 소득이 가장 낮은 어민은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며 “교육문화 수준을 높여 어민들이 급변하는 사회를 따라가게 해야 한다”고 재단 설립의 당위성을 해양수산부에 설명했다. 

 

 “우리나라 수출입물량의 90%가 해상을 통해 들어와요. 게다가 기름 피해, 공장 폐수, 바다모래 채취, 해상풍력 등 우리 어업과 어업인을 망치게 하는 일들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정유회사, 해운회사, 매립 간척, 바다모래 채취, 해상풍력 회사 등 바다를 이용하거나 바다에 피해를 주는 업종들에 대해 조금씩 기금을 모으면 엄청난 기금을 만들 수 있어요. 선사로부터 0,001%만 떼어도 기금이 엄청나게 커질 수 있어요. 또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으로 우리 어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데 왜 그들이 내는 벌금을 국고에 환수시킵니까. 어업인들이 자원조성을 위해 어린 고기를 방류하고 금어기를 두어 일부러 고기를 안 잡는 것을 그들이 불법조업을 해 잡아가지 않습니까. 이런 돈은 의당 어민들을 위해 써야 하는 게 맞는 얘기 아닌가요”

 그러나 해양수산부는 재단 설립 마저 못하게 했다. 공적자금을 받는 기관인데다 재단 설립을 위한 신규예산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새마을 기금을 모아서 3년 정도 끌었다. 이명박 정부를 설득해 정부 정책 30대 과제에 포함시켰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건 2010년 10월, 그러니까 회장 취임 후 3년이 지난 뒤에야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은 현판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 회장 뚝심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재단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만든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이 슬그머니 ‘수협재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4년 전 인터뷰 때에도 강하게 불만을 얘기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업인 교육문화복지재단 이름을 왜 수협재단으로 바꾸나요.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재단의 주인인 어업인을 빼고 왜 수협 이름을 넣습니까? 이게 수협 직원을 위한 재단입니까?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이라고 해야지 정부 예산도 많이 따올 수 있는데 재단 이름에서 어업인을 뺐어요. 스스로 기금 확장성을 없애 버렸어요.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러면서 “회장들이 연임하려고 입법 로비할 게 아니라 재단 기금 조성을 위해 줄기차게 의원들을 설득해야 한다”며 “재단 기금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정부가 어업인들 고민 안 할 정도로 재단에서 여러 가지 것을 해줄 수 있다”고도 했다. 재단이 어업인 실질 소득 및 삶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애착이 많은 재단 얘기가 나오자 그의 얘기는 간단없이 이어졌다. 다른 화제가 필요했다.

 -회장 그만두고 곧바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않았나요. 의원이 됐으면 이런 걸 바꿀 수 있었을 텐데요.

 “회장 할 때 아쉬었던 것, 느꼈던 것 국회의원 돼서 한번 해보려고 했었죠. 당내 경선에서 안 됐지만….그때 우리 어민들도 안 도와주던데요. 도와주기는커녕 훼방 노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던데요(웃음)” 

 -수협 혁신 얘기가 아직도 쉼 없이 나오는 것 같아 좀 안타깝습니다.

 “협동조합도 이제 혁신해야 합니다. 병리현상이 심해요. 점점 주객이 전도되고 있고요. 직원들은 싫어하겠지만 직원들이 주인인 어민들보다 소득이 훨씬 높아요. 수협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조합도 조합장, 이사, 대의원 모두 선거로 뽑는 선거판으로 전락했어요. 선거로 조합이 쪼개지고 조합원 간 갈등이 심해요. 빠른 시간내 제도를 획기적으로 고쳐서 선거 과열이 안 되게 하고 갈등을 줄이도록 해야 해요.”

 5선 조합장과 최장수 회장(8년 2개월 재임)답게 그는 중앙회와 조합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의 논리는 회장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고 오히려 그때보다 노선이 더욱 분명해 보였다. 그는 수협에 대해 “혁신하지 않으면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을 것”이라며 “이제 수협회장 등 책임 있는 사람들이 혁신에 앞장서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누구를 위해 연임하려고 합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까. 어민들을 위해서입니까. 거기에 쏟는 열정과 시간을 어민이 중심이 되는 수협으로 만드는 데 쓰기 바랍니다”

 저녁 8시, 그의 차가 창원중앙역에 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동안 그의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회장이 된다면 수산신문은 어떤 입장을 취할까 엉뚱한 생각과 그의 회장 때 모습이 겹쳐지면서.... <문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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