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어업인 위해 누군가 이 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
포럼 운영위해 혼자 1년에 3천만원 내고 4년간 외롭게 끌고 와
“해녀들 온종일 작업 누군가 보호해야 하는데...”

오태곤 한반도수산포럼 회장

 제주도 성산에서 대규모 광어양식을 하고 있는 오태곤(64세) 한반도수산포럼 회장은 요즘 썩 힘이 나지 않는다. 그는 한 때 2천여평 양식장에서 연간 200여톤의 광어를 생산했다. 그 뒤 양식장을 6천여평으로 늘렸다. 그리고 생산 목표를 6백톤으로 확대했다. 가능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목표는 꿈 같은 얘기가 됐다. 몇 년전부터 수요는 줄고 공급이 넘쳐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다. 연어 등 수산물 수입이 늘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광어보다 연어를 더 찾는다. 자연히 어가는 하락하고 경영은 어렵다. 코로나19 시대, 드라이브스루와 정부·지자체 지원을 통해 소비가 조금은 나아졌지만 어렵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포럼 회장 자리 놓고 고민

그러나 요즘 그를 더 괴롭히는 게 있다. 2016년부터 맡아 온 한반도수산포럼 회장 자리다. 할 사람이 없다는 전임회장(박덕배 전농식품 2차관) 권유로 이것을 맡아 온 게 벌써 4년째다. 그는 그동안 사비로 적지 않은 돈을 내 포럼을 운영했다. 1년에 3천만원 가까운 경비가 들어갔다. 김재기 전한국수산업경영인중앙연합회장이 간간히 도와준 게 전부. 나머지는 전부 오 회장이 감당했다. 그러나 남은 게 뭘까. 과연 포럼이 제대로 억할을 하고 있는지,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요즈음 무척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혼자서 오랫동안 포럼을 끌고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달 24일 그는 한국수산업경영인중앙연합회 사무실에서 포럼 임원들과 포럼 미래를 협의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비켜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회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것. 그가 이날 회의 장소를 연합회 사무실로 한 것은 연합회가 이 포럼에 같이 참여해줬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포럼을 어떻게 든 살려보겠다는 그의 간절함이 배어 있었던 선택이었다.

 이날 국회에서 만난 그는 “어려운 어업인을 위해서 누군가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데 할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어렵지만 나라도 맡아 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걸 맡았는데…”하면서 나머지 말은 잇지 않았다.

 어선, 상선 등 원양 승선만 13년

오 회장은 고향인 성산중·수고를 거쳐 여수수전 어업과를 다녔다. 5남 2녀 중 3남인 오 회장은 형들이 수산고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수산가족이 됐다. 졸업 후 오 회장은 실습선 생활을 거쳐 고려원양 트롤선을 타고 7년간 오대양을 누볐다. 그리고 해양대에서 6개월 코스로 상선 훈련을 받은 뒤 4년간 상선을 탔다. 그러니까 무려 13년 동안 어선과 상선을 타면서 원양에서 생활한 전형적인 뱃사람이다. 바다 한복판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로 화상을 입기도 하고, 엔진이 꺼지고 태풍 2개가 한꺼번에 발생해 배가 종이배처럼 빙글빙글 도는 상황을 맞으면서 사투를 벌여야 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탄 배가 일본에서 건조된 배였는데 복원성이 없었으면 그때 그대로 바다에 묻혔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 했다.
 그러다 1987년 국내에 들어와 복어잡이 어선을 탔고 29톤급 어선 선장을 하기도 했다. 1989년, 우리나라에 광어 양식 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형들과 같이 고향인 제주 성산에 양식장 7백평을 만들어 광어 양식을 하기 시작했다. 사업도 괜찮았다. 여유가 생기면서 그는 경영인 연합회 활동을 시작한다. 제주연합회장을 시작으로 중앙회 부회장 2번을 거쳐 2008년 마침내 중앙회장에 당선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회장 재임 시에는 농수산대학 설립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지금 연합회의 운영과 재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신문사(한국수산경제신문)를 인수하기도 했다. 그는 회장 재임 시 어느 누구보다 더 의욕적으로 일했다. 당시 협회 임원으로 있던 한 경영인 후계자는 “어업과 출신으로 수산을 알면서 회장 일을 하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과의 차이가 어떤가를 그때 느꼈다”고 했다. 그는 농특위원, 농촌희망재단 비상임이사, 농어업선진화 위원,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 이사 등을 맡아 어업인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대외 활동에 참여했다.

 그 아니면 포럼 명줄 다했을 수도

이후 그가 맡은 게 한반도수산포럼 회장. 그는 2016년 회장을 맡은 후 사비를 들여 포럼, 세미나를 개최했다. 대기업의 수산물 수입 반대, 백령도 현지 방문, 새만금 해수 유통 등 적지 않은 세미나를 개최했다. 물론 기억에 남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포럼은 ‘자기들만의 리그’로 끝난 게 태반이었다. 반향도 없고 호응도 많지 않았다. 오 회장이 이 포럼을 맡지 않았다면 이 포럼은 아마 진즉 명줄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 회장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포럼을 끌고 왔다.
“내가 제주에 사니까 보잖아요. 해녀들이 하루 온종일 물질하고 야간작업까지 하잖아요. 이런 사람들을 누군가 보호하고 대변해 줘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어디 해녀들만 어렵겠느냐. 아직도 맨손으로 조개를 캐는 어업인들,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목숨을 걸고 바다에 나가 조업하는 영세한 선주들이 한둘이 아니다”며 “그들을 위해 누군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다”고 했다. 이런 마음이 결국 4년간 그를 포럼 회장으로 잡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유가 많지 않다. 사업에 전념해도 일이 잘 풀릴 것 같지 않다. 마음도 조금은 지쳐 있다. 그래서 그는 일단 동반자를 찾고 있다. 같이 포럼을 운영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어업인 위해 헌신한 '참수산인' 소리들어

그는 “진정으로 포럼을 같이 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하는 데 손바닥을 마주칠 사람도 없다. 한국수산업경영인중앙연합회와 포럼 운영에 동반자가 되고 싶지만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한 수산인은 “돈도 안 되는 자리에 1년에 3천만원 가까이 돈을 내고 이렇게 오래 동안 포럼을 끌고 갈 수산인이 있으면 한번 찾아보라”며 “그는 4년 동안 혼자서 이 어려운 일을 감당했다”고 했다. 어려운 어업인들을 위해 조그만 일이라도 하겠다며 사비를 털어 포럼을 운영해 온 오태곤 회장,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참 수산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 그를 자연인 수산인으로 돌려 보내주는 게 그를 위한 우리들의 배려가 아닌지. <문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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