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장은 자기 욕심을 내거나 그 자리를 출세 위한 바탕 삼아선 안돼

 

 "모든 판공비와 조합장 의전 다 없앴다 당시 나는 존경받는 지도자는 아니어도 나쁜 지도자는 되지 말자는 목표를 가졌었다"

 

 “(수협)조합장은 자기 욕심을 내거나 그 자리를 출세를 위한 바탕으로 삼아선 안 됩니다”
조동길 前대형기선저인망수협(이하 대형기저수협) 조합장은 3개월 전 왼쪽 콩팥에서 암이 발견돼 서울대병원에서 암 제거 수술을 받았다. 다소 핼쑥해진 얼굴이었지만 조합장 역할과 관련한 얘기가 나오자 그의 말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조합장은 조합원들의 사회·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책임이 있습니다. 권한을 누리라고 조합장 시킨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첫째도 봉사고 둘째도 봉사고 셋째도 봉사입니다. 이런 것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는 2000년 5월 조합장에 당선됐다. 수협에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일선조합 방만 경영이 문제가 돼 조합구조조정을 하던 시기였다. 그는 부실우려조합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먼저 조합장 기득권을 포기했다. 조합장 월급을 40% 삭감했다. 그리고 조합 차를 거부하고 자기 차로 출근했다. 운전사도 없앴다. 특별한 일 이외에는 카드 사용도 거부했다.
 그는 15년 동안 해양수산부와 수협중앙회, 국회 등을 가기 위해 대한항공만 670회를 탔다고 했다. 다른 비행기나 열차 등 다른 교통편까지 합치면 1,000번은 넘을 거라는 게 당시 직원들 얘기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업무 때문에 서울에 올라갔다는 얘기다. 그가 이렇게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도 직원들을 데리고 간 건 두세 번 정도. 출장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그는 월급도 처음부터 한 푼도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 총무과에 맡겨두고 필요한 곳에 썼다. 남은 돈을 퇴직할 때 받아 갔으니까 그가 어떻게 조합장을 해 왔다는 것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가 조합장을 처음 맡을 당시 조합 순자본금이 -30억원이었지만 2년 만에 이를 흑자로 전환했다. 또 상호금융 지점 통폐합, 방만운영 철폐 등으로 순자본금이 500억원으로 늘어나는 등 초우량조합으로 성장했다.

 “웬만한 돈은 내 돈으로 썼고 법인카드는 아예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공공의 돈은 1원 한 장도 사적으로 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조합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됐고 조합장 선거 사상 첫 4선 무투표라는 협동조합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만든 배경이 됐음은 물론이다.

 

수산신문 창간호 1면 모델로
 그의 이런 행동은 많은 어업인들의 공감을 얻었고 2004년 본지 창간호 1면에 그를 소환하는 계기가 됐다. 본지는 장승우 해양수산부장관과 어민을 대표한 파트너로 그를 선택해 대담을 하게 했다. 깨끗한 이미지가 수산신문이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와 맞는다는 판단에서다. 신문 창간호 1면에 광고까지 없애고 전면을 대담으로 할애한 것은 당시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가 이런 환경을 만든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1948년 남해에서 출생했다. 1967년 남해수고를 졸업한 후 68년 해군 시험을 보기 위해 부산에 갔다가 배를 타면서 55년 수산 외길을 시작한다. 20대에 ‘몸값이 최고로 비싼’ 어로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도 했으며 배를 탄 지 13년 만에 자기 회사(세화수산)도 설립했다. 그 와중에 근하수산이라는 수산회사 전무로 재직해 행정 능력을 키웠다. 또 대형기저수협 이사로 재직하면서 현장과 행정 전문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논리가 탄탄해 그의 주장을 반박할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게 당시 수협 사람들 얘기다. 이러던 참에 2000년 대형기저수협이 부실우려조합이라는 위기에 처하면서 그는 조합원들의 부름에 따라 조합에 입성한다. 조합을 정상화시켜달라는 조합원들의 요구에서다. 이때 그의 나이 51세. 그는 2년 만에 조합을 정상화시켰다. 조합장 핸드폰도 반납했고 조합에 불요불급한 전무 사택과 삼천포 사택, 마산 비업무용 토지 등을 매각했다. 은행 점포도 2개를 줄였고 인천지소는 아예 없애 버렸다. 그는 “돌아가신 삼성 이건희 회장 말대로 마누라 빼고 바꿀 건 모두 바꾸겠다는 생각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조합장 재직 시 2번 수협중앙회장에 도전할 기회도 있었다. 한번은 정상욱 수협회장이 문제가 있어 중도에 그만뒀을 때이고 한번은 이종구 회장 연임 때 일이다. 당시 정 회장은 조 조합장한테 회장 출마를 권유하면서 자신을 지지했던 조합장들이 그를 지지해줄 거라는 얘기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사양했다. 아직 조합에 할 일이 있고 지금은 도전할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이종구 회장 연임 때는 농식품부와 수협중앙회와 관계가 인사 문제로 어긋나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오고 이종구 회장 단독 출마가 예상되자 한쪽에서는 그가 도전해주기를 바라는 기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는 회장 출마를 사양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

 “수산전문가가 없다”
 조합장 재직 15년 동안 많은 화제를 낳았던 그는 지난달 30일 기자와 만나자 “지금은 수산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많이 식었다”고 했다. 수산인들이 듣기엔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현장과 실무행정 전문가로써 그의 날카로움은 여전했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는 수산전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현장 전문가가 없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가 가장 먼저 대비 해야 될 게 바로 기후 변화라고 했다.
“지금 수산업이 험난하다고 하는 데 그건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정부는 수산자원 고갈의 주된 원인을 어민들 남획으로 보지만 내가 현장에서 본 것은 기후 변화입니다. 여기에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과거 어장 연구만 하던 어로장이었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그가 주장하는 몇 가지 근거는 이렇다. 우리나라는 동중국해가 주어장인데 이 어장이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어류가 사는 아열대성 어장으로 변한 지 오래됐다고 했다. 그는 북위 2도 이상 어장이 북상했다고 분석했다. 1도가 60마일이니까 120마일이 북쪽으로 올라갔다는 얘기다. 그 근거로 제주 근해 고기가 울릉도, 독도에서 나오고 해파리군 이동도 그래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또 종적을 감춘 쥐치, 동해안 명태 등도 남획이 원인이 아니라 모두 기후 변화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남해안에 먹이생물의 가장 기초단계에 있는 멸치 자원이 최근 줄어드는 것은 심각한 징조라고 경고했다. 어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후, 먹이, 수온, 생태 환경이 필요한 데 이런 환경이 파괴되고 먹이 사슬이 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술한 지가 얼마 안 돼 다소 기력이 떨어져 보였던 그는 수산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아직도 많은 모양이다.
 “바다 밑은 자갈밭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모래밭도 있고 산호초도 있고 모래와 뻘 등이 섞여 있는 다양한 곳인데 제대로 바다현장 연구가 안 돼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바다 현장 연구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는 한 예로 “샛바람(동풍)이 불면 낚시도 안 되고 조업도 안 되는 데 시물레이션 실험을 통해 원인을 규명해 볼 수 있는데도 정부는 안 하고 있다”며 “현장을 축소해 수족관에 동풍이 불게하고 실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정부의 무대책을 아쉬워 했다.
“50년 전부터 바다의 생태계 변화가 시작됐다고 봐야 합니다. 제가 어로장을 하면서 느꼈던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동안 무대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이제라도 거기에 대한 대책이 나와야 할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 “정부의 용역이 용역 그 자체로만 끝날 게 아니라 실제 산업으로 연결돼야 그것이 살아 있는 용역 아니냐”며 “그런데도 정부 연구는 연구의 실용성, 시기, 적정성 등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대형기저업계에 원죄처럼 따라다니는 게 있다. 바로 동경 128도 이동 조업 문제다. 한때 대형기저는 공동어시장만 벗어나면 조업구역 상 모두 불법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원관리법 상 어업허가권 영역을 장관령(부령)으로 제한하는 것은 상위법령을 하위법령으로 제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이 문제를 잘 알고 계셨지만 지역 편차가 커 그대로 두신 것 같다”고 했다.
계속 논란이 끊이지 않는 수협회장 선거인 수 확대 등 수협법 개정에 대해서는 “공평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 것 아니냐”는 말로 해법이 쉽지 않음을 설명했다. 그는 “선거인수를 조합원에 비례해 늘린다면 일부 지구별 조합은 조합원이 1만명도 넘고 업종별은 20명 뿐이 안되는 조합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업종별은 힘을 못 쓸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수협의 생존 목적이 고기를 잡아 식량화하는 것이라면 이런 것도 공평 요인 중 하나로 포함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단순히 조합원 수에 의해 선거인수를 늘리는 것은 공평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인터뷰를 끝내고 점심을 마친 그는 사업을 이어받은 아들 조용호씨(세화수산 대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공동어시장 인근 남항 바닷가를 향해 걸어갔다. 기자는 그가 사무실을 가기 위해 시장 우측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놓지 않았다. 그의 활동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으로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조합을 위해 조합장 월급도 삭감하고, 관용차도 매각했다. 모든 판공비와 조합장 의전을 다 없앴다. 당시 나는 존경받는 지도자는 아니어도, 나쁜 지도자는 되지 말자는 목표를 가졌었다" 2015년 그가 퇴임 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 다시 울림처럼 떠올랐다. <문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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