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동 칼럼/ 문영주 편집국장

봄이다. 죽은 듯이 겨울을 나던 나무에 새 순이 돋는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는’ 게 봄이다.  모든 게 생동한다. 어느 소설가 얘기처럼 나무마다 싹이 트고 거리마다 봄이 핀다. 

봄의 전령들이 제주에서 올라오면서 산과 들은 꽃들의 경연장이 된다. 어떤 화가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얼마나 장관인가. 개나리, 진달래, 매화, 목련이 자태를 뽐내면 다른 쪽에선 벚꽃, 유채꽃, 튤립, 산수유 등이 꽃잎을 날리며 심란한 사람의 눈동자를 붙들어 맨다. 

특히 벚꽃은 어느 꽃보다 화사하다. 꽃에 취하면 그냥 꽃만 보일 정도다. 삭막한 도시의 찌든 사람들 마음을 잠시나마 씻어준다. 피어있는 모습보다 떨어지는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라는 벚꽃. 우리는 꽃비가 내리듯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잠시나마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다.

벚꽃이 모든 거리를 잠식

매년 4월이면 전국적으로 벚꽃으로 이름난 곳에는 벚꽃 축제가 벌어지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진해를 비롯해 사천, 경주, 공주 마곡사를 비롯해 화개~쌍개사의 벚꽃길에는 그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이런 상황 속에 누가 감히 벚꽃을 뭐라 하겠는가.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선비 같은 고운 자태를 뽐내는 목련, 이리저리 엉키면서도 남성답게 커가는 샛노란 개나리, 잎이 나기도 전에 연보라색으로 꽃이 피는 진달래는 벚꽃의 위세가 무서워서인지 도심에서 그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또 제주도에서 3월부터 피기 시작하며 온통 대지를 노란색으로 적시는 유채꽃, 산수화, 여기에 이름 모를 들꽃까지 봄을 봄처럼 만드는 꽃들이 수없이 많은데도 우리나라 봄에는 그들의 수줍은 자태는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 길게 늘어선 벚꽃나무만이 몫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과객을 맞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이 준 아름다움이 아니다. 자연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융합한다. 어느 특정 꽃만이 이 대지를 빌려 쓰는 게 아니다. 비가 오면 비를 안고, 눈이 오면 눈을 편하게 안아 주는 게 자연이다. 꽃씨가 날아 정착하고 그 곳에서 나무와 꽃을 피운다. 자연은 모든 가로수를 벚꽃이 독점하는 그런 재벌 체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거리엔 벚꽃이 물결을 이룬다. 매화도 피고, 목련도 피고, 산수화도 피고, 연두색 나무들이 같이 어우러져야 봄이 예쁜데 벚꽃만 보이는 것 같다. 아무리 장미가 예쁘다고 정원에 온통 장미만 심는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들꽃도 있고 못생긴 호박꽃도 있어야 장미도 아름답고 벚꽃도 아름다운 것 아닌가. 그러다가 장미를 죽일 수 있는 전염병이라도 창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산을 봐라. 연두색과 초록 색 빛깔을 띤 나무들과 각양 각색의 나뭇잎들이 조화를 이루고 그 사이 사이 진달래도 피고 벚꽃이 피어야 예쁘지 않겠는가.

민주주의는 다양성이 기본이다. 피부도 틀리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영위하는 게 민주주의다. 그런 것처럼 꽃들도 민주주의를 하면 안 될까. 재벌 독점이 시장 경제를 망친다고 하면서 우리는 지금 행여 ‘벚꽃 독점’시대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 가.

수산계도 벚꽃처럼

지금 우리나라 수산계도 마찬가지다. 벚꽃처럼 어느 특정대가 주류 세계를 독점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내 수산 쪽은 의례 그들이 주도권을 잡아야 하고 산하단체의 장은 그들의 싹쓸이 장소가 돼야 한다. 물론 특정대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벚꽃처럼 어는 특정대학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 아닌가. 

벚꽃이 살기 위해서는 그 옆에 다른 꽃을 심어 놓는 게 정석이다. 그래야 벚꽃도 살고 다른  꽃들도 산다. 담을 쌓고  벚꽃만 피게 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며칠이나 가겠는가. 그래야 땅도 강해지고 꽃들도 외부 병 앞에서 강해진다. 지금 수산계는 온통 거리를 벚꽃으로 덮은 것처럼 행여 특정대학이 모든 것을 독과정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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