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청 개청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행시 출신 여성 사무관
해수부 되고 첫 여성과장·여성국장 ‘첫’자 꼬리표 달고 다녀

해수부 출신 최초 해외 대사로 유리 천장깨고 새로운 길 열어

 

부드러우면서도 원칙
철저히 지키는 '외유내강형' 공직관 지녀

"국제업무 전문가 부족...
준비하면 기회 올 것"  후배들에 조언

 

김제 선머슴이 가는 길은 역사가 됐다. 수산청 행시 출신 첫 여성사무관, 해양수산부 되고 나서는 첫 여성과장, 여성국장. 그리고 해양수산부 출신 첫 여성대사. 그녀는 계속 ‘첫’자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바로 조신희(52. 행시 36기) 피지대사다.

그녀는 주변에서 천재 소녀라는 소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노는데 바쁜 선머슴이었다. 대학(한양대학교) 들어갈 때도 검·판사가 되겠다고 법과를 1지망으로 했다. 그러나 떨어졌다. 2지망으로 택한 독어독문과에 합격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김제에서 전주로 옮겨 고등학교를 다닐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내신 등급을 잘 받기 위해 옮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김제여고에서도 내신 3등급을 받았죠. 황당한 친구 아닌가요”
친구들과 수다 떨고 얘기하는 게 재밌었단다.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노는데 더 바빴다고 했다. 2학년 때까지는 미팅도 하고 대학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다 3학년 들어서면서 철(?)이 들기 시작했다. 뭔가 해야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맹모3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아니었지만 읍사무소와 법원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오빠의 영향 때문인지 공무원에 생각이 꽂혔다. 그 때부터 고시에 매달렸다. 1989년 대학 졸업하면서 1차에 합격했다. 대학고시기숙사에 들어가 2차 준비를 했다. 그러나 2번이나 떨어졌다. 2차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것이다. “찍기는 잘 하는데 주관식이라 적응하는 데 엄청 고생했다”고 했다. 그러다 고시 공부를 한 지 5년만인 1992년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리고 93년 사무관 임관 후 첫 보직을 받은 게 수산청이다. 행시 출신이라곤 한 두명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다 오면 곧바로 다른 부처로 떠나려는 ‘행시 사무관들의 무덤’이 수산청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뿌리를 내렸다. 바다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데에서 일하는 게 더 보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마 운명이 정해졌던 모양이에요”

 
그 때 그의 결정은 그의 인생을 바꾸기 시작했다.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은 5월 30일 바다의 날 행사에서 수산청과 해운항만청, 해경을 합쳐 해양수산부를 만들겠다고 했다. 졸지에 부가 된 것이다. 사무관 임관 10년 후인 2003년, 인천지방해양수산청 선원해사과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그러다 2년 뒤인 2005년 정식 과장이 돼 직무훈련을 받기 위해 2년간 미국에 갔다. 이후 보직을 받은 게 어업교섭과장이었다. 이것은 지금 피지 대사에 가게 한 단초가 됐다. 어업교섭과장 경력이 2010년 주중국참사관에 가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됐기 때문. “그 때 중국대사관에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 내가 뽑힌 것은 어업교섭과장 자리에 있으면서 한일, 한중어업협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3년 반 중국에 있었다. 운이 좋았다”
그녀는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계속 국제협력 쪽 업무를 했다. 그러다 과장이 된지 10년만인 2015년, 국제원양정책관이 되면서 첫 여성국장이 된다. 20년 가까이 국제협력을 한 그가 국제협력 야전사령관이 된 것이다. “이 때는 승진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공직 생활 중 처음 느낀 감정이었으니까요”
그는 3년 가까이 이 자리에 있으면서 원양업계로부터 욕도 많이 먹었다. 외국에 나가 불법어업을 한 선사에게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행정제재를 취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고 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그대로 유지했다. 국제사회로부터 우리나라가 불법어업국가로 찍혀 국가 이미지가 훼손되고 이로 인해 다른 부문까지 악영향을 받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부드러우면서도 원칙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공직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녀는 또 세계수산대학을 한국에 유치하고 시범사업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크고 작은 대외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내가 주중대사관에 있을 때 중국 사람과 만나 업무협의를 하다보면 나에게 외교관 DNA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어요(웃음). 공직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때는 IUU 대응 때이고요, IUU 방지 때문에 평생 들어야 할 욕도 이 때 다 먹은 것 같고요“
그녀가 이번에 가게 된 피지 대사는 본인이 가고 싶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다. 외교통상부가 인사혁신 차원에서 30%까지 외부인사 영입을 확대키로 했고 그녀가 추천됐기 때문이다. “해양수산부와 업무 연관성이 있어 우리 부에서 추천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해양수산부 일원이였기 때문에 가게 된 자리죠. 해수부 명예를 위해서도 잘 해야 될 것 같아 솔직히 부담이 적지 않아요”

 
피지의 총인구는 90만명, 우리교민은 1,500명이 살고 있다. 조 대사의 주임무는 교민보호와 양국 간 협력 강화다. 피지대사관에는 외교관 4명 등 16명의 직원이 있다. 조 대사는 피지 대사 말고 키리바시, 나우루투바루, 마이크로네시아, 마샬 등 5개국 겸임대사까지 맡아야 한다. 조 대사는 “피지에도 도움이 되고 우리나라에도 도움이 되는 그런 일을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서 10시간, 우리나라 국적선이 일주일에 3번 왔다 갔다 하는 남태평양 섬나라에서 그는 또 다른 인생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녀는 후배들에게 “해양수산부는 국제 업무가 많다”며 “국내업무에 너무 올인하지 마라”고 했다.  “국내업무는 대체재가 널려 있지만 국제 업무는 전문가가 없어요. 국제기구 고위직 진출 기회가 많아요. 준비만 잘 하고 있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여자라는 이유로 주저하지마라”며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능력과 상관없이 주위에서 욕은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 바로도 돌아오고, 한참 후에도 돌아오더라”고 했다. 24년 공직에서 얻은 값 비싼 교훈이다. 조 대사는 대학기숙고시원에서 만나 1996년 결혼한 남편은 일(세무사) 때문에, 또 큰 아들은 대학에 다니다 군대 대기자로 있어 막내아들만 데리고 11일 현지에 부임할 예정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그런지 결혼을 앞둔 신부처럼 마음이 설레요. 3년간 최선을 다해 일하고 오겠습니다. 후배들이 앞으로 제가 간 길을 편하게 갈 수 있도록 길을 잘 다져 놓고 올게요”
유리천장을 깨고 새 길을 만들어 온 선머슴이 피지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 <문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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